♪ Dawid Podsiadło - Little Stranger

Dear Kairo,

손 편지에 대한 낭만이 다 죽은 시대에 이렇게 글을 쓴다는 게 얼마나 덧없는 일처럼 보일지 나도 잘 알아. 더군다나 그것도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망자에게 보내는 거라면 더욱 부질없을 테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발송인이라니, 아마 네가 여전히 형체를 가지고 있었다면 내 눈앞에서 이 종이를 찢어버려도 나는 이해해야만 하겠지.

이 글은 동부 배드랜드의 어느 허물어진 주유소에서 훔쳐 온 조악한 기념엽서 몇 장에 적히고 있어. 왜냐면 아라사카의 휘황찬란한 달 기지에서 내려오자마자 가장 처음으로 향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곳이 그 황폐한 사막이었거든. 리틀 차이나에 있는 익숙한 ‘우리 집’이 아니라, 왜 그곳으로 무작정 페달을 밟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언젠가의 네가 서 있었을지도 모르는, 풀 한 포기 자라나지 않는 절벽의 끝자락에 서서 손 틈새로 흘러내리는 모래를 쳐다보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인 삶의 지혜라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봐. 아니면 어느새 내가 잃어버린 ‘원칙’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결국 그 끝에서 찾은 건 아무것도 없었어. 도시로 돌아가는 길에 여느 때와 같이 나에게 시비 거는 네 ‘후배’ 레이스 몇 놈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는 경험 말고는.

있잖아, 나는 살면서 후회라는 걸 하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라고 여겨왔어. 후회라는 걸 하려면 일단 기대를 먼저 해야 하고, 그러려면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어야 하잖아. 현재를 살아가는 것에 급급한 나에게는 먼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겨를 따위 없었어. 내 눈앞에서 침을 뱉고 있는 스캐빈저에게 조금 전에 쓰레기장에서 주워 온 정키의 시체를 넘겨야 오늘 저녁에 먹을 이지비프가 겨우 생기는 상황에서, 어떻게 대의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었겠어? 아라사카가 ‘헤게모니’의 정점에 서서 나이트 시티를 어떻게 휘두르든, ‘그람시’라는 이름은 나에게 그저 햄버거 맛집에 지나지 않을 뿐이야. 바트모스 컬렉티브가 잔혹한 자본주의에 대해 무어라고 지껄이든, 네가 50년 전에 무슨 마음으로 AHQ에 핵폭탄을 두 번이나 떨어뜨렸든, 나에게는 모두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라고. 진정한 자아실현이든 대범한 사회개혁이든, 우선 ‘살아있어야’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적어도 나는 너를 만나기 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그렇게 ‘생존’하는 것만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달려왔는데, 그 끝에 도착한 곳이 이런 초라한 결말이라니. …하지만 너는 이미 예상했겠지. 그러니까 그때 나에게 그렇게 실망하고 불같이 화를 냈던 걸 테고.

근데, 그거 알아? 인류가 우주를 어느 정도 정복한 지금도,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닿지 못할 ‘달’이라는 곳에 환상을 가지고 있어. ‘달을 왕복할 만큼 너를 사랑한다’라는 말이라던가, 달의 불법 클리닉으로 가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굴었던 그 가련한 넷러너라던가, 또는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모든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처럼 말하던 과장광고라던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나는 지구를 떠나 달에 도착하고서야 살면서 처음으로 후회했어. 중력을 거스르고, 내 이성을 시험하는 매일이 이어지던 어느 날… 아주 오랜만에 네 목소리를 들었거든. 네 목소리가 이끄는 곳을 따라 문을 열면 한계 따위 없는 드넓은 우주가 펼쳐졌고, ‘우리’는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았어. 살아온 시간 동안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이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었던 ‘나’에게도 미래라는 게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어. …알잖아, 네 목소리는 참 잊기 힘든 매력이 있다는 거. 그래서 너에게 대답하려던 찰나, 아무도 없는 텅 빈 무균실에서 다시 나 혼자 눈을 뜨게 되더라고. 그제서야 뒤늦게 깨달은 거야. 너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거짓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너를 언제부터 그저 정교하게 짜인 알고리즘, 잔뜩 꼬여있는 데이터 덩어리 이상으로 여겼던 걸까? 처음부터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별할 수밖에 없는 예견된 운명의 선로에 놓여있었는데…. 아직 사람 하나 죽일 때마다 토하던 시절에 네가 내 떨리던 손을 겹쳐 잡고 총기를 조준하던 감각, 약을 한껏 들이켜고 낡아빠진 아파트의 소파에 같이 늘어져 있던 고양된 정신, 그리고 어스름한 네온사인의 불빛이 난반사되던 뒷골목에서 처음으로 입을 맞춘 후 보이던 네 얼빠진 표정…. 그래, 사실 나는 모두 기억해. 아라사카의 그 대단한 의사들이 나를 마치 테세우스 배처럼 해체하고 재조립하여, 밀려오는 허무에 어쩔 수 없이 젖어가며 절망감을 씹어 삼키던 중에도…. ‘나’라는 인간을 구성하던 어떤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데도, 너만큼은 선명하게 기억났어. 그래서 그동안 네가 감히 나에게 ‘특별하다’라고 느껴지는 그 순간들을 전부 부정하고 도망치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불행하게도, 너나 나나 둘 다 ‘아름다운 작별 인사’에 능숙한 사람들은 아니잖아. 나는 더 이상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어. 나에게 의미가 있는 모든 것을 뺏어가는 이 도시가 원망스러웠어. 그러니 처음부터 ‘너’를 부정해 버린다면, 애초에 잃어버릴 여지가 없는 것처럼 군다면…….

…전하지도 못할 편지를 적는 행위 따위에 의미가 있을까?

아마 앞으로 몇 개월 남지 않은 내 비루한 삶을 모두 쏟아붓는다고 하더라도, 너와 달리 나는 사람들의 깊은 상념에 파고드는 시인이 되지는 못할 거야. 이런 감성적인 문장을 몇 줄 적는다고 해서 어떤 위대한 목적도 이루지 못하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이름도 남기지 못하겠지. 그러니 어쩌면 나는, 이런 기회를 통해 그저 너와 다시 한번만이라도 말을 나누는 기분을 내고 싶었던 것뿐일지도 몰라. 너와 나 사이의 관계를 포함해… 이미 나의 인생은 모든 게 다 엉망진창으로 끝나버렸지만, 그래도.

지긋지긋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또다시 서게 되니, 떠오르는 얼굴이라고는 너뿐이라서….

정말이지, 우리는 각자 인생의 가장 이상한 순간에 서로를 만났어. 안 그래?

그리고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동안 고마웠다고.

From.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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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아마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어김없이 같은 선택을 하겠지. 너는 이건 ‘우리’에 대한 배신이라고 분노할 테고, 나는 네가 역시 내 ‘생존’에는 관심이 없었던 게 맞다고 분노할 거야. 그러니까 부디 나를 용서하지 마. 어차피 이 빌어먹을 도시에 ‘해피엔딩’이라는 건 없으니까….